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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다케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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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다케아키라는 막부 말기 하마다 번과 쓰루타 번의 다이묘이다.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아들로 태어나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을 상속받았고, 하마다 번주를 거쳐 쓰루타 번주가 되었다. 조슈 정벌에 참여했으나 병으로 지휘하지 못했고, 조슈군의 침공으로 하마다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보신 전쟁 당시 신정부의 요구에 따라 가신의 할복으로 공순 의사를 표명했으며, 폐번치현으로 지번사에서 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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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다케아키라
기본 정보
마쓰다이라 다케아키라
시대에도 시대 후기 - 메이지 시대 중기
출생덴포 13년 1월 26일 (1842년3월 7일)
사망메이지 15년 (1882년) 11월 7일
개명주로마루 (유명) → 아키오토 (초명) → 다케아키라
묘소도쿄도아라카와구히가시닛포리의 젠쇼지
관위종4위하・시종, 우콘노쇼겐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요시 → 이에사다 → 이에모치 → 요시노부 → 메이지 천황
이와미하마다 번 번주 → 미마사카쓰루타 번 번주, 쓰루타 번지사
씨족미토 도쿠가와가 → 오치 마쓰다이라가
아버지도쿠가와 나리아키
어머니나오 ( 야마노베 요시치카의 딸 )
양아버지마쓰다이라 다케나리
형제자매겐히메, 슈쿠히메, 도쿠가와 아키타케, 마쓰히메, 도쿠가와 요시노부, 이케다 요시토쿠, 이케다 시게마사, 나오타카, 야시로히메, 다케아키라, 기쓰레가와 쓰나요시, 아키쿠니, 도쿠가와 사다코, 다다카즈, 쓰치야 아키나오, 아이코, 도쿠가와 아키타케, 요시토쿠, 요리유키, 마사히메
배우자정실: 마쓰다이라 히사코
자녀다케나가, 쓰네요시, 도모코, 기요코
오치 마쓰다이라가 당주
역임 기간1847년 ~ 1873년
대수8대
전임자마쓰다이라 다케나리
후임자마쓰다이라 다케나가
하마다 번 번주 (오치 마쓰다이라가)
역임 기간1847년 ~ 1866년
대수4대
전임자마쓰다이라 다케나리
후임자조슈번의 점령으로 폐번, 오치가는 다즈타로 쫓겨남
다즈타 번 번주 (오치 마쓰다이라가)
역임 기간1867년 ~ 1871년
후임자폐번치현

2. 생애

덴포 13년(1842년) 미토번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열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카 4년(1847년) 사촌인 선대 번주 마쓰다이라 다케나리의 양자가 되어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을 상속하고 하마다 번주가 되었다. 번주로서 검약령 시행, 다카쓰 강 치수 공사, 식산흥업 추진 등을 통해 번 재정 재건에 힘썼다.

막말의 동란기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동생으로서 막부를 지지하는 사쿠보파에 속했다. 게이오 2년(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에 참가했으나, 병으로 인해 직접 지휘하지 못했고[1] 번군은 조슈번 군대에 크게 패배했다. 조슈군이 하마다 영내로 침공하자 하마다 성에 불을 지르고 미마사카국 쓰루타로 피신하여 쓰루타 번주가 되었다.

보신 전쟁 이후 신정부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병환과 번사들의 구 막부군 가담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판적 봉환으로 쓰루타 지번사가 되었고, 폐번치현으로 면직되었다. 메이지 6년(1873년) 은거하여 장남 다케나가에게 가독을 물려주었으며, 메이지 15년(1882년)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문 상속

덴포 13년(1842년) 1월 26일, 히타치국 미토번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열 번째 아들(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야마노베 씨 나오(야마노베 요시카타의 딸)이다. 어릴 적 이름은 拾郎丸|주로마루일본어이며, 처음 이름은 아버지로부터 편휘를 받아 昭徳|쇼인일본어이라 하였다.

고카 4년(1847년) 11월 29일, 선대 번주 마쓰다이라 다케나리(사촌)의 마지막 양자로서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을 상속받았다. 이에 따라 武聰|다케사토일본어로 바꾸었다. 가에이 6년(1853년)에는 검약령을 내려 부정행위를 엄격히 단속하고, 다카쓰 강의 치수 공사를 벌였다. 또한 가와바타 겐모쓰를 등용하여 이와미 반시(종이) 생산과 양잠업식산흥업을 추진하며 번 재정 재건에 힘썼다. 안세이 원년(1854년) 12월 15일에는 종4위하 시종, 우근장감에 임명되었다.

막부 말기의 혼란 속에서, 요시노부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사쿠보파(佐幕派, 막부 지지파)에 가담했다. 게이오 2년(1866년)의 제2차 조슈 정벌에 참가했으나, 4월에 큰 병을 앓아[1] 직접 지휘하지 못했다. 그가 지휘하지 못하는 사이 야마모토 한야가 이끄는 번군은 조슈번오무라 마스지로가 이끄는 강력한 군대에게 크게 패배했다. 조슈군이 하마다 영내로 침공하자, 같은 해 7월 18일 하마다 성에 불을 지르고 기즈키(현재의 시마네현 이즈모시)로 도망쳤으며, 이후 마쓰에로 이동했다. 하마다가 조슈번에게 점령당하자, 게이오 3년(1867년) 3월에는 비지(飛地, 본 영지와 떨어진 영토)인 미마사카국 쓰루타(2만 석)로 근거지를 옮겨 쓰루타 번주가 되었고, 이때 영지는 2만 8천 석으로 가증(加增)되었다.

2. 2. 하마다 번주 시절

고카 4년(1847년) 11월 29일, 선대 번주 마쓰다이라 다케나리(사촌)의 마지막 양자가 되어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을 상속받았다. 이때 통자에 따라 이름을 '''다케사토'''(武聰)로 바꾸었다. 가에이 6년(1853년)에는 검약령을 내려 재정 긴축을 시도하고 부정행위를 엄격히 단속했다. 또한 다카쓰 강의 치수 공사를 벌이고, 가와바타 겐모쓰를 등용하여 이와미 반시(종이) 생산과 양잠업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하여 번의 재정을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안세이 원년(1854년) 12월 15일, 종4위하 시종, 우근장감에 임명되었다.

막말의 혼란 속에서, 요시노부의 동생이라는 관계 때문에 사쿠보파(막부 지지파)에 가담했다. 게이오 2년(1866년)에 벌어진 제2차 조슈 정벌에 참가했으나, 4월에 큰 병을 앓아[1] 직접 지휘를 할 수 없었다. 조슈번오무라 마스지로가 이끄는 강력한 군대에 맞서 야마모토 한야가 지휘한 하마다 번 군대는 크게 패배했다. 조슈 군대가 하마다 영내로 침공하자, 같은 해 7월 18일 하마다 성에 스스로 불을 지르고 기즈키(현재의 시마네현 이즈모시)로 도망쳤으며, 이후 마쓰에로 이동했다. 하마다가 조슈번에게 점령당하자, 게이오 3년(1867년) 3월에는 비지(영지 교환으로 얻은 땅)인 미마사카국 쓰루타(2만 석)로 근거지를 옮겨 쓰루타 번주가 되었다. 이때 고쿠다카는 2만 8천 석으로 오히려 증가했다.

2. 3. 쓰루타 번주 시절

게이오 2년(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에 참가했으나, 4월에 큰 병에 걸린[1] 다케아키라는 직접 지휘를 할 수 없었다. 조슈번오무라 마스지로가 이끄는 군대 앞에서 야마모토 한야가 이끄는 번군은 크게 패배했다. 조슈군이 하마다 영내로 침공하자, 7월 18일 다케아키라는 하마다 성에 불을 지르고 기즈키(현재의 시마네현 이즈모시)로 도망쳤으며, 이후 마쓰에로 이동했다. 하마다가 조슈번의 점령 하에 놓이자, 게이오 3년(1867년) 3월, 비지(영지)였던 미마사카국 쓰루타(2만 석)로 근거지를 옮겨 쓰루타 번주가 되었고, 이때 2만 8000석이 추가되어 영지가 늘어났다.

보신 전쟁 발발 후, 신정부는 각 번에 복종의 의사를 표시하고 번주나 대리인이 교토로 와서 천황을 배알하도록 요구했다. 또한 오개조의 서약 발표 후에는 번주 또는 대리인이 공경과 제후들이 작성한 봉답서에 서명함으로써 신정부 하에서 번의 존속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 절차를 따르지 않은 번은 실제로 저항하지 않았더라도 구 막부 편으로 간주되어 '조적'으로 몰렸고, 반대로 신정부군과 싸워 '조적'으로 간주되었더라도 번주가 신속히 사죄하고 근신하면 용서받아 절차에 참여할 수 있었다.[2]

쓰루타 번의 경우,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번주 다케아키라가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자발적으로 근신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조슈 정벌 때부터 앓던 병이 낫지 않은 상태였다.[3] 게다가 번 소속 병사 30명이 다케나카 시게카타가 지휘하는 구 막부군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쓰루타 번이 조적으로 간주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신정부는 2월 28일, 쓰루타 번에 복종의 증거로 번주 다케아키라가 직접 상경하여 사죄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다케아키라는 병세가 위중하여 상경이 불가능했고, 후계자인 구마와카마루(훗날의 다케나가) 역시 4살의 어린 아이라 상경할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번이 조적으로 토벌될 것을 우려한 쓰루타 번은 오카야마 번 및 돗토리 번[4]과 상의한 끝에, 윤 4월에 가로 3명의 할복을 조건으로 상경 연기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신정부 측도 번주와 후계자가 상경할 수 없는 사정을 이해했지만, 다른 번과의 형평성 문제로 쓰루타 번만 예외를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한 단계 더 무거운 처분으로 윤 4월 15일 가로 1명의 할복을 명했고, 같은 날 도쿄에 머물던 가로 오제키 하야토가 할복했다. 이후 5월 10일, 쓰루타 번에 2만 7800석이 추가로 주어져 최종 석고가 6만 1천 석이 되었는데, 이는 신정부가 결과적으로 적의가 없던 쓰루타 번에 가로 할복이라는 가혹한 처벌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보상적 성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케아키라의 병은 이후에도 회복되지 않아, 쓰루타 번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신정부 복종 절차의 최종 단계인 봉답서 서명을 폐번치현 때까지 완료하지 못했다. 폐번치현 후인 메이지 4년(1871년) 8월 23일, 다케아키라가 가족과 함께 도쿄로 이주한 뒤에도 결국 황거에 참내하지 못했다.[5]

메이지 2년(1869년) 6월 24일, 판적 봉환에 따라 쓰루타 지번사로 임명되었다. 메이지 4년(1871년) 7월 15일, 폐번치현으로 인해 지번사에서 면직되었다. 메이지 6년(1873년) 3월 23일, 은거하여 장남 다케나가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메이지 15년(1882년) 11월 7일,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4. 메이지 시대

보신 전쟁 당시 신정부는 각 번에 대해 복종의 의사를 표시하고 번주 또는 그를 대행할 수 있는 신분의 인물(전 번주 또는 세자)이 상경하여 천황에게 배알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오개조의 서약이 발표된 후에는 번주 또는 그 대리인이 공경과 제후들이 작성한 봉답서에 서명해야만 신정부 하에서 번의 존속이 보장되었다. 이 절차를 따르지 않은 번은 실제로 무력 저항을 하지 않았더라도 구 막부 편에 선 '조적'(조정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반대로 신정부군과 교전하여 일단 '조적'으로 간주된 번이라도, 번주가 신속하게 사죄하고 근신하면 신정부로부터 용서를 받아 이 절차에 참여할 수 있었다.[2]

쓰루타 번의 경우,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번주인 다케아키라가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자발적으로 근신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조슈 정벌 때부터 앓던 병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3] 여기에 더해 쓰루타 번 소속 병사 30명이 다케나카 시게카타가 지휘하던 구 막부군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쓰루타 번이 조적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문제에 대해 신정부는 2월 28일, 쓰루타 번에 복종의 증거로 번주 다케아키라 본인이 직접 상경하여 사죄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다케아키라는 병세가 심각하여 상경이 불가능했고, 세자인 구마와카마루(훗날의 다케나가) 역시 4세의 유아여서 상경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쓰루타 번은 이대로 가다가는 조적으로 몰려 토벌될 것이라 판단하고, 오카야마 번 및 돗토리 번[4]과 상의한 끝에 윤 4월, 가로(번의 중신) 3명의 할복을 조건으로 상경 연기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신정부 측도 번주와 세자가 상경할 수 없는 사정을 이해했지만, 다른 번과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쓰루타 번에게만 상경 면제라는 예외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한 단계 더 무거운 처분으로 윤 4월 15일, 가로 1명의 할복을 명했고, 같은 날 도쿄에 머물고 있던 가로 오제키 하야토가 할복했다. 5월 10일, 쓰루타 번의 석고(영지의 생산량)가 2만 7800석 늘어나 최종적으로 6만 1천 석이 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적의가 없었던 쓰루타 번에게 가로 할복이라는 가혹한 처벌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신정부의 보상적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 후에도 다케아키라의 병은 회복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쓰루타 번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절차의 최종 단계였던 봉답서 서명을 폐번치현 때까지 완료하지 못했다. 폐번치현 이후인 메이지 4년(1871년) 8월 23일, 다케아키라가 가족과 함께 도쿄로 이주했지만 결국 황거에 참내(궁궐에 나아가 뵙는 것)하지는 못했다.[5]

메이지 2년(1869년) 6월 24일, 판적 봉환에 의해 쓰루타 지번사로 임명되었다. 메이지 4년(1871년) 7월 15일, 폐번치현으로 인해 지번사에서 면직되었다. 메이지 6년(1873년) 3월 23일, 은거하여 장남 다케나가에게 가독(가문의 우두머리 자리)을 물려주었다. 메이지 15년(1882년) 11월 7일,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계보


  • 아버지: 도쿠가와 나리아키 (1800년 ~ 1860년)
  • 어머니: 나오 - 야마노베 요시카타의 딸
  • 양아버지: 마쓰다이라 다케나리 (1825년 ~ 1847년)
  • 정실: 마쓰다이라 히사코 (1848년 ~ 1893년) - 홋타 마사요시의 여덟째 딸. 다른 이름은 비사코.
  • * 장남: 마쓰다이라 다케나가 (1865년 ~ 1920년) - 아명은 구마와카마루.
  • 생모 불명의 자녀
  • * 아들: 마쓰다이라 쓰네키치
  • * 딸: 토모코 - 마쓰다이라 가타히로의 부인
  • * 딸: 세이코 - 다테 무네사다의 부인

참조

[1] 서적 三百藩家臣人名事典 5 新人物往来社 1988
[2] 서적 戊辰戦争と「朝敵」藩-敗者の維新史- 八木書店 2011
[3] 서신 三条実美에게 보낸 서신 1868-03-11
[4] 기타
[5] 서적 戊辰戦争と「朝敵」藩-敗者の維新史- 八木書店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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